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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 추억과 그리움의 절창_그 애틋한 청산도의 봄날-김종근 미술평론

2023.06.08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것은 남아 있으며 뿌리 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 그리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득 문득 정말 이름 모를 어떤 그리움에 사무친다. 그것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되는 것이다.
“날씨도 춥고 먹을 것 입을 것 하나 변변치 않고, 낮에는 하늘과 구름뿐이고, 밤이면 벌레소리와 스치는 댓잎 소리뿐이라”고 탄식 했던 다산 정약용의 시구도 그런 유배지에서 보낸 그리움의 마지막 절창이다.
이처럼 신철의 그림 속에는 몇 개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짜여 있는데 그 중 심에 놓여 있는 것이 그리움이며 추억이다.   
작가는 스스로 '그리움이 절실해야 그림이 비로소 사랑을 알아챈다.'고 털어놓으면서 사무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애틋함을 한결같이 노래한다. 
그 그리움의 시대적 배경은 1960~70년대의 단발머리 소녀들의 풋풋한 낯설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바로 완도, 그가 태어난 작은 섬 청산도이다.
거기에 그가 사랑하고 흠모하던 어릴 적 소녀도, 그가 따라 다니며 고무줄을 끊어 놓고 도망치던 그 때의 누나들도 아직 그의 화폭에 겸연쩍게 쭈빗거리며 서 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런 다소 촌스러운 옷차림의 단발머리 누나, 소녀들이 이순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그리움의 원천이며 추억의 가장 강력한 씨앗 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키만큼 큰 꽃 앞에 있거나 , 꽃나무 아래에 엉거주춤 혹은 삐딱하게 서 있다. 가끔 푸른 하늘 위로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떠가고, 흰 매화는 흐드러지고 흘깃 훔쳐보는 소년의 마음이 얼룩져 있다.
뒷편에는 소녀의 키보다 더 큰 꽃들이 나무처럼 자리하고 지천에 붉은 꽃들이 포근한 봄날의 알록달록한 정경 그곳이 이내 청산도임을 말해준다. 
꽃길을 건너 바다로 이어지는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그림에서나 꽃, 나무, 소녀. 그리고 마음 설레게 하는 예쁜 소녀들이 불그스레한 표정으로 화가의 화폭 앞에 서서 우리들을 향해 유혹하고 손짓한다.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라고 아니 나의 어린 시절 그리움에 목말라 사무쳐 잠못이룬 코흘리개 시절, 고향 청산도로 오라고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청산도를 가보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으로 수없이 정겨운 청산도를 방문했다.  
지금도 작가는 늘 떨쳐낼 수 없는 그 풍경 속에 빠져 그 순간들을 떠올리고 바라보며 양평 수류산방의 아틀리에 화폭 앞에서 붓질을 서걱거린다.
그리움에 가슴을 졸이며 ,그리움에 잠을 뒤척이며 갈수 없는 그 행복한 꿈을 꾼다. 봄날, 미치게 푸른 하늘 청산도의 어린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을 말이다.
작가는  이것을 너무나도 도저히 잊지 못해 ‘기억풀이’라 부른다. 
어떤 그림을 보아도 그의 화면에는 소녀를 향한 어린 시절의 가슴 떨림과 봄이 오는 끝없는 설렘에 부대끼는 가슴 찡한 정경들을 남도 가락처럼 풀어낸다.
철없던 시절 바닷가 시골 촌 소년이었던 신철 , 그는 정녕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이었을까?
그는 입버릇처럼  "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되뇌었다. 
그에게 착한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철모르게 굴었던 그 장난기 어린 순수한 10대의 떨칠 수 없는 향수와 그리움, 그것과 함께 뒹굴던 추억들이다.
우리가 작가의 그림 속에서 한없이 순수함과 따뜻함에 마음 쿵쿵거리며 가슴을 흔들었던 찡한 우리들의 초상을 발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언제나 봄기운이 듬뿍 담긴 색채에서 부터 털목도리를 둘러 감고 눈 내리는 소녀가 있는 그 바닷가 정취까지 그 자연의 색채와 빛깔로 풀어내는 기억에 대한 한풀이가 신철 작품의 영혼이다.
여전히 그의 모든 그림에는 그리움과 추억으로 보는 이를 10대로 되돌려 놓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창한 봄날. 꽃이 듬성듬성 핀 거리에 데이트 나온 두 남녀의 모습. 그러나 남자는 등 뒤 손에 꽃다발을 감춰들고 있는 쑥스러운 표정과 순수한 척 하며 도도한 몸짓의 풋 소녀들로 인해 그 마력은 더욱 강력하고 눈에 아른거린다.
분명 신철은 시인이거나, 아직도 순수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미소년임이 틀림없다. 
더러는 아주 유치한 풍경처럼 그런 기억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된 어른 시인 말이다.
끝없이 그가 이런 풍경들을 펼쳐내는 한 인간이 가진 지독한 그리움의 카타르시스를 부여하는 것은 신철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의 선물이다. 
그는 그러한 그림의 주제들을 삶을 축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 모습을 더 명증성 있게 보이려 화면을 단순화하고, 과감하게 한 폭의 동양화처럼 여백에 그리움을 심어놓아 고향이 주는 그칠 줄 모르는 행복감을  완성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기억풀이’ 시리즈는 단순히 지나온 과거를 이야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움 속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중독성 있는 마약 같은 힘을 지닌 즐거운 놀이이다.
두근거리며 동네 어귀를 지나가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그 시절의 그리움에 초상화,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는 순수함과 따뜻함이 서려있는 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의 화가로서의 희망이 이루어졌다. 이미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그가 아주 맘씨 여리고 순수한 맘씨 착한 시인임을 기억하고 눈치 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의 잊고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행복하고 정겨웠던 10대의 소년이 되어 있는 우리들을 만나며 소스라치게 행복해 한다.
그런 점에서 신철의 그림은 그의 예술적 신념대로 충분히 그리움에 대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화가로서 목적을 이루었다. 
그래서 나는 이 환갑이 넘은 흰머리가 희끗한 그 미소년의 향수와 추억과 애틋한 그리움을 마구마구 사랑한다. 

김종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