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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스테이지 10월호] 이 작가를 말한다 - '풍경이 온다 展' 김상열, 중첩으로 자연을 재해석하다.
[굿스테이지 10월호] 이 작가를 말한다 - 김상열 인터뷰 보기 (클릭) : 23_kimsangyeol (goodst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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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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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뉴스 문화현장] 사진을 찢고 붙이며 탐구하는 '천상의 메시지'
[FunFun 문화현장] <앵커> 이어서 문화현장입니다. 푸른 하늘이나 붉은 노을 사진은 있는 그대로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사진 콜라주 작업을 통해 새롭게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친숙할 수도 있고 생경할 수도 있는 이미지로 천상의 메시지를 탐구합니다. 이주상 기자입니다. <기자> [천상의 메세지 / 10월 7일까지 / GP갤러리] 붉은 노을이 캔버스의 절반을 차지하며 몽환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나머지 절반은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듯 지상의 현실세계를 묘사합니다. 어둠이 묻어 있는 검푸른 하늘 아래 마을의 야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빛을 품고 있는 천상의 세계와 울긋불긋한 지상의 세계를 넓게 갈라놓은 중간 지대는 텅 빈 흰색입니다. 제주 하늘을 찍은 사진들을 찢고 오려 붙인 사진 콜라주 작업입니다. [전종철/작가 : 분명히 하늘 사진을 찍어서 재구성을 했는데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화가 되고 있다, 라는 거죠.] 푸른 하늘을 카메라로 찍어서 실크 천위에 프린트하고 비정형의 형태로 구긴 뒤 굳히면, 전혀 다른 하늘의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푸른 하늘과 붉은 노을을 천 위에 교차해서 프린트한 뒤 주름처럼 접기도 합니다. 늘 하늘 사진을 찍지만, 사진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보는 사람들이 의문을 갖도록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전종철/작가 : 아름다운 노을이라든지, 아름다운 하늘의 풍경 그대로를 전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작가가 거기에 개입을 해서 재 조작된 어떤 하나의 형상성을 통해서 하늘 같기도 한데 도대체 뭘까?] 사진을 찢고 붙이면서 작가는 하늘의 본성을 추구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실재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우연의 과정을 통해 천상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895701&plink=ORI&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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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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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의 꽃의 시간-김복기 미술평론
꽃을 그리는 마음 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1.안진의는 ‘꽃의 화가’다. 그의 작가 이력은 꽃 그림의 이력과 겹친다. 화력(畵歷)이 온전히 ‘화력(花歷)’인 셈이다. 그 역정이 물경 30년에 이른다. 이 세월에 그는 왕양한 꽃의 미술사에서 자기화의 물꼬를 트고, 조형적 천착의 길을 걸어왔다. 이른바 ‘한국화’ 혹은 채색화라는 전통에서 창작의 젖줄을 이어 다지면서도, 그 전통의 틀에 결코 자신을 가두지 않고 현대적 변용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대응해왔다. 전통의 현대화라 해도 좋고, 동서 미학의 혼성(hybrid)이라 해도 좋으리라. 나는 안진의의 꽃 그림을 그저 담담하게 컨템퍼러리아트라 부르고 싶다.안진의의 꽃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한국 미술계에서 꽃을 그리는 작가는 많고 많지만, 이만큼 조형적 힘과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다. 꽃 그림이라면 우리는 다소곳한 자태의 정물화나 가녀린 감성의 화조화를 떠올릴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양에서는 정물화보다 인물화 중심의 역사화가 상위 장르에 있었고, 동양에서는 화조화보다 산수화가 우위의 화목(畵目)이었다. 그런데, 안진의의 꽃은 다르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서 ‘소(小) 장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대(大) 장르’의 위용을 한껏 떨치고 있다. 꽃으로 그리는 ‘대화면’이요 ‘대서사’다. 2.안진의의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꽃을 뛰어넘은 꽃이다. 2010년을 전후로 안진의는 자신의 작품을 더욱 탄탄하게 양식화한 <꽃의 시간> 연작에 이르렀다. 이제 꽃은 ‘살아 있는 생명’의 메타포라 표현해야 옳다. 표현의 양식 또한 펄펄 살아있다. 꽃 그림의 감동에는 다양한 조형적 배려가 깔려 있다. 섬세하고 정교한 세필, 환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나는 석채, 넘실대는 음악적 율동, 전통 색지의 콜라주, 과감한 형상의 클로즈업, 올오버(all-over)의 추상적 구성…. 꽃의 대축제! 꽃의 천국이 아닌가.안진의는 꽃의 외양뿐만 아니라 꽃의 마음을 그린다. 말하자면 ‘정신으로서의 꽃’을 그린다. 여기에다 꽃을 감싸는 빛과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해낸다. 필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필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꽃은 바람결에 흩날리거나 해저의 수초처럼 흔들리고, 꽃은 별이 빛나는 밤에도 조용히 숨을 내쉰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비상하는 몇 가닥의 필선이나 미끄러지듯 퍼지는 마티에르는 유유히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장치다. 정중동의 내밀한 찰나, 그 나지막한 숨결까지 붙잡는다.안진의는 꽃 그림에 시간의 개념을 덧붙였다. 시간이란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 그 숙명의 순환! 이 대목에서 안진의의 꽃 그림은 화려한 장식적 외양을 넘어 깊고 넓은 존재론의 물음을 던진다. 그는 말한다. “육체가 아닌 영혼의 시간, 영겁의 시간, 찰나의 향기를 고스란히 안아 화폭에 놓았다.” 그렇다. 우리는 안진의의 꽃의 의미를 더 확장해야 한다. 안진의는 꽃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꽃이라는 밭에 세상을 심는다. 이것이 바로 안진의 예술의 지표다. 이미 여러 논자가 지적한 바 있다.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고, 침묵을 발언으로 탄생시키며…, 시간의 저편을 건너간 것들에게 생명의 빛깔을 입힌다.”(김민웅)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변신과 포용의 가능성을 바라보는”(정여울) “우리네 삶의 비의 같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조화롭지만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갈망과 희원…”(김창식) 이렇듯, 안진의의 꽃 그림에는 삶의 본질에서 진실(혹은 진리)을 쫓는 예술가의 숭고한 ‘자기 정화’ 의식이 깔려 있다.안진의의 꽃 그림은 크기와 관계없이 하나의 꽃밭, 정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정원은 동양 산수화의 도원경, 서양 풍경화의 아르카디아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틋한 향수, 다가올 미래의 벅찬 희망을 안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안진의의 꽃 그림은 자연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대다수가 감축 모형이다.”(레비스트로스) 안진의는 자연을 꽃으로 감축했다. 그 시간의 차원까지 감축했다. 예술작품이란 결국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가 아니던가. 꽃에서 자연과 우주에 이르는 도정. 화가 안진의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꽃이다!” “내가 자연이다!” 이것이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이니라. 3.나는 컨템퍼러리아트의 문맥에서 안진의의 꽃 그림을 해석하고 싶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시리즈를 주목한다.안진의는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구, 새, 의자, 종이배 같은 소재에 꽃을 덧입힌 일련의 작품을 제작한다. 자연과 일상, 자연과 문명의 자연스러운 만남이다. 특히 백열전구와 꽃의 조합이 흥미롭다. ‘알’이라는 형상 자체가 모든 사물의 단자(monad)에 가깝다.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성을 띠고 있다. 열쇠 모양의 전구 스위치는 수수께끼 같은 미지 세계의 문을 연다. 또 어둠을 밝히는 ‘빛’도 희망의 메시지, 타자와의 소통, 더 나아가 숭엄한 종교의 후광(aura)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종이배나 의자에도 무구한 동심부터 철학적 함의까지 담는다. 꽃 그림이 비근한 일상의 모티프와 만나 다양한 의미 층을 일궈낸다.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역시 대작이다. 구체적인 꽃의 이미지는 점차 기호화되어 추상적인 화면으로 치닫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동양화적 번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동양화의 추상표현주의적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이 대작은 야생의 밀림이나 깊은 바다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화면의 울림이 가히 일품이다. 우연과 필연, 밝음과 어둠, 부분과 전체, 감성과 지성…, 안진의는 이 대립의 조형 언어를 균형과 조화의 화면으로 몰아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으로 말하면, 다이내믹한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이다. 안진의는 이 폭발적인 시각 형식에 자연의 힘찬 에너지를 흠씬 녹여낸다. 삼라만상이 펼쳐내는 생명의 파노라마!이즈음 안진의가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각각의 꽃 그림을 전시장에서 (재)맥락화하는 다양한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공간 설치, 관객과의 워크숍 등으로 안진의의 꽃 그림 세계를 공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작품’이라는 컨템퍼러리아트 최전선의 콘셉트로 꽃 세상을 활짝 연다. 안진의의 꽃은 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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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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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열 바람의 정원-김윤섭 미술평론
김상열의 “자연 너머의 본질을 좇는 새로운 여백”글_김윤섭(아이프미술경영연구소 대표, 미술사 박사) 김상열의 작품세계는 파도나 물결의 모티브를 매개로 한 ‘Landscape-섬(2005~2008)’시리즈, 나뭇가지와 이파리 그림자를 활용한 ‘Secret garden(2008~2020)’시리즈, 중첩된 산줄기 운무를 연상시키는 ‘wind garden(2020년 9월 이후)’시리즈 등으로 구분된다. 작품의 시각적 표상은 크게 다르지 않아도 앞의 두 시리즈(Landscape~Secret garden)가 구상성이 강한 반면, 최근의 ‘wind garden’ 시리즈부터는 추상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2008년 하반기에 시작된 ‘Secret garden(비밀의 정원)’ 이후는 ‘실루엣(silhouette)’ 혹은 ‘허상(虛像)회화’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작품일수록 명도와 채도를 적절하게 활용한 절제된 색채추상의 면모도 보여준다. 현재의 작품스타일이 탄생한 것은 코로나19가 일상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2020년 9월 즈음이다. 작가적 삶은 가뜩이나 집과 작업실만을 오가는 단조로움의 연속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더더욱 침잠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작업실 난방을 위해 화목난로를 때던 차에 우연히 ‘재’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작업재료의 발견이었다. 마치 끝없는 인간의 욕망이 불타버린 후에 남은 부산물처럼, 재는 헛된 허영심마저 증발시킨 숭고함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 재를 검정 물감에 섞어 화면의 밑칠을 수차례 반복한 후, 다시 그 위에 일련의 색을 수십 차례 입혀가는 중첩과정들을 거쳐 완성한 것이 지금의 ‘wind garden’ 시리즈이다. 더없이 부드럽고 견고하며 농밀한 깊이를 자아내는 감성의 탄생과정이다. 이처럼 김상열의 색면은 서서히 공기층을 쌓아 자연의 나이테를 만들어내듯, 특유의 농도조절로 바람결의 피부를 완성해낸다. 아름다운 색조화장의 꽃은 파운데이션(foundation) 효과이듯, 아마도 재를 활용한 맨 밑층이 없었다면 지금의 시각효과도 많이 둔감해졌을 것이다. 김상열은 속된 티가 전혀 없이 맑고 아름다운 청아함을 자연의 얼굴빛에 선물했다. 세상에 ‘완전한 처음’이 있을까? 모든 일엔 연유(緣由)가 있듯, 시발점도 있기 마련이다. 김상열에게 ‘재의 발견’도 이미 십 수 년 전에 유사한 징조가 있었다.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아이들이 연필을 깎고 남긴 흑연가루들을 치우며 우연하게 ‘난로의 재’처럼, 번뜩이는 섬광이 떠올랐다. 흑연가루를 체에 내린 후 손으로 문지르니 일렁이는 파도가 되고, 숨 쉬는 산이 되었다. “작업에서 반복된 행위에서 남겨진 반복된 선과 색은 산이 되고 강이 되고 길이 된다. ‘바람의 정원(Wind garden)’이라는 명제에서의 바람은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순간이며 찰나인 것이 곧 자연의 이치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허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보다는 찰나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의 큰 틀은 언제나 자연이다. 나의 작품 속 자연은 단순한 재현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향한 사유의 공간이 되길 원한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이치처럼,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발현되길 바라며,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스며들 듯이 피어나길 바란다.” 대개 자연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경외감을 이끌어내는 숭고함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 자연물의 모티브를 온전하게 화폭에 옮긴다는 것은 작가에겐 쉽지 않은 과정이다. 어쩌면 ‘자연-自然’이란 이름처럼, 인위적인 계산보다 있는 그대로 순결한 ‘내려놓은 마음가짐’으로 대할 때 비로소 자연의 본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김상열의 그림도 그렇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부지불식간에 몸에 밴 향기처럼 어느 덧 스며든다. 보는 이의 오감육감을 매료시키는 부드러운 미학의 표본이다. 특히 정화(淨化)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재’로부터 출발해, 신묘하게 중화(中和)된 담채 톤의 색조가 더욱 빛을 발한다. 아마도 김상열의 ‘wind garden’ 시리즈는 자연의 본질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는 관문이 아닐까 싶다. 최근 작품 ‘wind garden’ 시리즈는 보다 자유로워진 감성을 자아낸다. 마치 ‘존재의 본질’을 ‘회화적 본질’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전 ‘Secret garden’ 시리즈에서 보여준 자연의 형상성이 떠난 자리엔 분무된 엷은 색조의 결만 남았다. 실제로 전작은 잎이 무성한 식물이나 나뭇가지를 화면에 올린 후 물감을 에어브러쉬(airbrush)로 분사해 ‘자연물을 캐스팅해내는 방식’을 선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회화의 기본요소로만 화면을 채워 ‘물성의 시각화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좇는 형국이다. 최소한의 구상적인 실루엣은 남았어도 추상성을 활용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열린 통감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평소 “큰 틀에서 자연을 표현하지만, 저 너머의 본질을 향해 쉼 없이 묵묵히 걸어갈 것”이란 작가의 말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김상열에게 자연은 작품의 시작점이자 과정이며, 마지막의 끝점일 것이다. 그렇게 묵묵히 수행자적 행로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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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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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철 천상의 메세지-고충환 미술평론
이토록 황홀한, 절정의, 무상한, 덧없는 하늘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가 전종철은 1995년 제2회 공산미술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한국화단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소재로 설치작업을 했는데, 제단 형식의 무너져 내린 유리 탑과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통해 희생자의 원혼을 기리고 위무하는 제의적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제단 형식의 조형감각과 제의적 퍼포먼스가 작가에 잠재된 예술가_무당의 기질을 예감하고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예술가와 무당은 친족이라고 해도 좋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동물들을 그려 넣어 주술을 행했던 인류 최초의 예술가가 샤먼이었던 이래로, 가깝게는 요셉 보이스가 스스로 현대판 샤먼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의 중재자가 무당이라고 이해한다면, 가시적인 세계를 통해 비가시적인 세계의 비의를 해독하고 암시하는(신은 비정상 언어를 통해 계시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말을 거는데, 예술은 바로 그 비정상 언어와 관련이 깊다), 감각세계와 관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의 행태가 무당의 행실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될 때, 인간은 자기가 유래한 곳을 쳐다본다. 자기가 유래한 곳? 존재론적 근원, 존재론적 고향, 존재론적 원형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서 근원과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 개념이라기보다는 존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 그러므로 존재 감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원형의 경우는 어떤가.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기억? 아득한 기억? 바로 존재가 유래한 근원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이 무의식에 아로새겨지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원형적 상징이 그 기억을 일깨운다. 여기서 반복 상징 그러므로 원형적 상징으로 제시되는 경우 중 결정적인 경우가 하늘이다. 그러므로 다시, 존재론적으로 될 때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져내린다고도 한다. 왜 하늘인가. 하늘은 다름 아닌 존재가 유래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곧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곧 존재가 무너지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근작에서 하늘바라기 한 일련의 사진들을 들고나왔다. 작가는 진즉에 예술가_무당의 기질이 다분한 설치작업으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 증명 그러므로 신고식을 치른 바 있고, 하늘과 땅의 중재자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의 사제답게 자신의 하늘 사진에 존재론적인 의미를 담았다. 혹은 반무의식적으로 그러므로 어쩌면 필연적으로 존재론적인 의미가 작가의 하늘 사진에 저절로 담겼다. 그렇게 작가와 하늘과의 인연은 깊다. 진즉에 1983년 학부 시절 그린 그림 속에도 하늘은 있었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쪽문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린 것인데, 허물어진 벽면 사이로도 하늘 조각이 들어와 있다. 바닥에는 지금처럼 깨진 유리 조각이 널브러져 있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벽면을 지탱이라도 할 요량으로 밧줄이 묶여 있다(작가의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최소한 예감하는 대목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어둑한 반지하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암울한 시대 감정 혹은 세대 감정을 위로하고 위무해주는 주술이며 자기최면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늘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후 독일 유학 시절 짓누르는 듯 낮게 깔린 우울한 기질의 잿빛 하늘에 매료되었고(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그러므로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귀국 이후에는 마치 하늘에(허공에) 드로잉이라도 하듯 물감을 잔뜩 묻힌 맨발로 캔버스를 밟고 다녔다. 실제로도 유리 천장을 통해 허공에 드로잉한 것을 올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하늘 그러므로 빛의 색깔을 조형으로 불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세기말 프로젝트로 방점을 찍는다. 세기가 바뀌는 경계 지점에 설치작업을 한 것인데, 서울의 남산타워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일종의 솟대로, 토템폴로 가정한 것이다(2000, 20과 21 사이의 설치풍경). 신화적으로 성소(세상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한 장소)와 세계수(세계의 중심에 자라는 신성한 나무)와 우주의 배꼽(옴파로스) 서사를 전수하고 확대 재생산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앞서 삼풍백화점 희생자를 기리는 제의 퍼포먼스와 함께, 작가의 예술가_무당으로서의 기질을 반영하고 대표하는, 작가 작업의 두 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제주에 칩거한다. 그리고 이후 근 10여 년 사진기를 도구로 하늘바라기에 전념한다. 여기서 전념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보통 전념한다고 하면 그 목적대상이 분명하고 그 과정 또한 이미 상당할 정도로 감을 잡은 상태에서 입문하고 통과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하늘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하늘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열린 하늘에서 작가는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인가. 하필이면 왜 하늘인가. 왜 자신을 하늘에 던지는가. 왜 무방비 상태의 자신을 무작정 열린 하늘에다 던지는가. 현상학에 보면, 에포케 곧 잠정적 판단중지가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겪는 것은 모두 개념(그러므로 어쩌면 타자)으로 오염된 것이다. 개념으로 보고, 개념을 통해 듣고, 개념이 알려준 것을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이 없다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겪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들은 것이 없고, 겪은 것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마치 생전 처음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발가벗은 세계와 발가벗은 내가 생판 처음으로 마주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스스로 의식의 백지상태(영도지점)에 놓아보자. 그러면 비로소 세상 자체가, 개념화되기 이전의 세계 자체가 마침내 내 앞에 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내 앞에 있는 것이 진정 현상이고 세계일 것이다. 하늘이 꼭 그렇다. 우리는 하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하지만, 사실 하늘 자체를 본 적이 없다. 범신론과 물활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인간과 호흡을 같이하던 시절에 하늘은 존재가 유래한 원천이었고, 경외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자체였고(하이데거는 존재 혹은 존재 자체와 존재자를 구분하는데, 존재자가 존재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삶을 내고 죽음을 거두어들이는 신이었다. 그 잔재가 숭고의 감정으로 남아 현대에 전수되는데, 칸트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영성주의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의 추상회화가 그렇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연속성 회복기획(삶과 죽음은 원래 연속돼 있었는데, 자본주의가 효율성을 내세워 죽음을 금기시하면서 둘은 분리되었다고 본다)이 그렇고, 프로이트의 삶(에로스)을 정화하는 죽음(타나토스) 기획이 그렇다. 이 모두가 하늘의 뜻이고 의미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왜 하늘을 말하면서 삶과 죽음이 소환되는가. 원래 하늘과 땅은 하나였고, 그 유비적 의미를 분유한 그러므로 나눠 받은 삶과 죽음 또한 하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작가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원래 하늘과 땅은 하나 그러므로 어쩌면 최초의 신인 혼돈으로부터 유래했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무당의 초혼의식에서처럼 하늘에서 하늘 자체를 불러내고, 존재에서 존재 자체를 불러낸다.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의 향연(주이상스 그러므로 신들의 주연?)을 불러내고, 시시각각 태와 꼴을 바꾸는 변화무쌍한, 그러므로 무상한, 붙잡을 수 없는, 변신의 귀재인 신들을 불러내고, 에토스의 장엄과 격렬한 파토스를 불러내고,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불러내고, 개념 이전의, 의미화되기를 거부하는, 의미가 되지 않아도 좋을, 의미가 되지 않은 채로 이미 충분한, 다만 상기와 암시를 통해서만 소통하는 의미소(시어?)를 불러낸다. 다만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름과 빛깔은 욕망의 표상일 뿐, 그 표상 이전에서, 그 밑에서 침잠하면서 사로잡는, 그러므로 어쩌면 내면의 하늘을 불러낸다. 이토록 형형색색의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이토록 황홀한 하늘을 본 적이 없다. 작가는 하늘을 소재로 한 자신의 사진 작업을 찰나를 잡은 순간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순간의 미학으로 치자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떠올리게 되는데, 작가의 경우에는 하늘이 색을 포함한 무채색마저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져 가장 황홀한 순간의 포착을 의미할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존재가 절정에 이른, 그러므로 무상하고 덧없는 순간의 박제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황홀한, 절정의(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했다), 무상한, 덧없는 하늘 사진을 예시해준다. 때로 콜라주 형식으로 원본을 찢어서 재구성한, 마치 땅과 하늘로 양분된 풍경을 보는 것 같은, 집 같기도 하고 얼기설기 모여있는 가옥이며 마을 같기도 한, 그러므로 어쩌면 그 자체 또 다른 하늘, 제2의 하늘, 해석된 혹은 재해석된 하늘이기도 한, 하늘 속에 하늘이 들어있는 이중 혹은 다중 하늘을 예시해준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을 찍는다기보다는 하늘을 그리고 만드는, 다시, 그러므로 자기만의 하늘을 재구성한 일련의 콜라주 사진 조형 작업을 제안한다. 작가는 그렇게 때로 개념 없는 눈으로, 발가벗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 자기_타자를 맞아들이기를(하늘에서 저마다 자기와 만나기를)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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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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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Stage "GP겔러리 최윤영 대표 인터뷰"
Good Stage에 GP겔러리 최윤영 대표님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기사클릭-> 23_choiyunyoung (goodsta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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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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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하늘의 마음을 품은 작가 , 가을 하늘을 열다. 전종철 작가 ' 천상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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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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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_문화 [문화단신] 전종철展 ‘천상의…’ 내일부터 GP갤러리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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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