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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의 꽃의 시간-김복기 미술평론
2022.09.07
꽃을 그리는 마음
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1.
안진의는 ‘꽃의 화가’다. 그의 작가 이력은 꽃 그림의 이력과 겹친다. 화력(畵歷)이 온전히 ‘화력(花歷)’인 셈이다. 그 역정이 물경 30년에 이른다. 이 세월에 그는 왕양한 꽃의 미술사에서 자기화의 물꼬를 트고, 조형적 천착의 길을 걸어왔다. 이른바 ‘한국화’ 혹은 채색화라는 전통에서 창작의 젖줄을 이어 다지면서도, 그 전통의 틀에 결코 자신을 가두지 않고 현대적 변용이라는 시대의 과제에 대응해왔다. 전통의 현대화라 해도 좋고, 동서 미학의 혼성(hybrid)이라 해도 좋으리라. 나는 안진의의 꽃 그림을 그저 담담하게 컨템퍼러리아트라 부르고 싶다.
안진의의 꽃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다. 한국 미술계에서 꽃을 그리는 작가는 많고 많지만, 이만큼 조형적 힘과 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다. 꽃 그림이라면 우리는 다소곳한 자태의 정물화나 가녀린 감성의 화조화를 떠올릴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양에서는 정물화보다 인물화 중심의 역사화가 상위 장르에 있었고, 동양에서는 화조화보다 산수화가 우위의 화목(畵目)이었다. 그런데, 안진의의 꽃은 다르다. 작품의 형식과 내용에서 ‘소(小) 장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대(大) 장르’의 위용을 한껏 떨치고 있다. 꽃으로 그리는 ‘대화면’이요 ‘대서사’다.
2.
안진의의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꽃을 뛰어넘은 꽃이다. 2010년을 전후로 안진의는 자신의 작품을 더욱 탄탄하게 양식화한 <꽃의 시간> 연작에 이르렀다. 이제 꽃은 ‘살아 있는 생명’의 메타포라 표현해야 옳다. 표현의 양식 또한 펄펄 살아있다. 꽃 그림의 감동에는 다양한 조형적 배려가 깔려 있다. 섬세하고 정교한 세필, 환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나는 석채, 넘실대는 음악적 율동, 전통 색지의 콜라주, 과감한 형상의 클로즈업, 올오버(all-over)의 추상적 구성…. 꽃의 대축제! 꽃의 천국이 아닌가.
안진의는 꽃의 외양뿐만 아니라 꽃의 마음을 그린다. 말하자면 ‘정신으로서의 꽃’을 그린다. 여기에다 꽃을 감싸는 빛과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해낸다. 필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필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꽃은 바람결에 흩날리거나 해저의 수초처럼 흔들리고, 꽃은 별이 빛나는 밤에도 조용히 숨을 내쉰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비상하는 몇 가닥의 필선이나 미끄러지듯 퍼지는 마티에르는 유유히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장치다. 정중동의 내밀한 찰나, 그 나지막한 숨결까지 붙잡는다.
안진의는 꽃 그림에 시간의 개념을 덧붙였다. 시간이란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생성과 소멸, 탄생과 죽음, 그 숙명의 순환! 이 대목에서 안진의의 꽃 그림은 화려한 장식적 외양을 넘어 깊고 넓은 존재론의 물음을 던진다. 그는 말한다. “육체가 아닌 영혼의 시간, 영겁의 시간, 찰나의 향기를 고스란히 안아 화폭에 놓았다.” 그렇다. 우리는 안진의의 꽃의 의미를 더 확장해야 한다. 안진의는 꽃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꽃이라는 밭에 세상을 심는다. 이것이 바로 안진의 예술의 지표다. 이미 여러 논자가 지적한 바 있다.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고, 침묵을 발언으로 탄생시키며…, 시간의 저편을 건너간 것들에게 생명의 빛깔을 입힌다.”(김민웅)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서 변신과 포용의 가능성을 바라보는”(정여울) “우리네 삶의 비의 같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조화롭지만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갈망과 희원…”(김창식) 이렇듯, 안진의의 꽃 그림에는 삶의 본질에서 진실(혹은 진리)을 쫓는 예술가의 숭고한 ‘자기 정화’ 의식이 깔려 있다.
안진의의 꽃 그림은 크기와 관계없이 하나의 꽃밭, 정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정원은 동양 산수화의 도원경, 서양 풍경화의 아르카디아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틋한 향수, 다가올 미래의 벅찬 희망을 안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안진의의 꽃 그림은 자연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작품은 대다수가 감축 모형이다.”(레비스트로스) 안진의는 자연을 꽃으로 감축했다. 그 시간의 차원까지 감축했다. 예술작품이란 결국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가 아니던가. 꽃에서 자연과 우주에 이르는 도정. 화가 안진의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꽃이다!” “내가 자연이다!” 이것이 바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이니라.
3.
나는 컨템퍼러리아트의 문맥에서 안진의의 꽃 그림을 해석하고 싶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시리즈를 주목한다.
안진의는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전구, 새, 의자, 종이배 같은 소재에 꽃을 덧입힌 일련의 작품을 제작한다. 자연과 일상, 자연과 문명의 자연스러운 만남이다. 특히 백열전구와 꽃의 조합이 흥미롭다. ‘알’이라는 형상 자체가 모든 사물의 단자(monad)에 가깝다.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성을 띠고 있다. 열쇠 모양의 전구 스위치는 수수께끼 같은 미지 세계의 문을 연다. 또 어둠을 밝히는 ‘빛’도 희망의 메시지, 타자와의 소통, 더 나아가 숭엄한 종교의 후광(aura)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 종이배나 의자에도 무구한 동심부터 철학적 함의까지 담는다. 꽃 그림이 비근한 일상의 모티프와 만나 다양한 의미 층을 일궈낸다.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역시 대작이다. 구체적인 꽃의 이미지는 점차 기호화되어 추상적인 화면으로 치닫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동양화적 번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동양화의 추상표현주의적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이 대작은 야생의 밀림이나 깊은 바다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화면의 울림이 가히 일품이다. 우연과 필연, 밝음과 어둠, 부분과 전체, 감성과 지성…, 안진의는 이 대립의 조형 언어를 균형과 조화의 화면으로 몰아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식으로 말하면, 다이내믹한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이다. 안진의는 이 폭발적인 시각 형식에 자연의 힘찬 에너지를 흠씬 녹여낸다. 삼라만상이 펼쳐내는 생명의 파노라마!
이즈음 안진의가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각각의 꽃 그림을 전시장에서 (재)맥락화하는 다양한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공간 설치, 관객과의 워크숍 등으로 안진의의 꽃 그림 세계를 공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작품’이라는 컨템퍼러리아트 최전선의 콘셉트로 꽃 세상을 활짝 연다. 안진의의 꽃은 또 피어난다.